3월 말 밴라이프를 시작한 이후 거의 4개월 만에 처음으로 밴을 떠나서 잠을 자게 되었다. 우리의 집이고 이동수단이며 너무나 사랑하는 보금자리였지만 수리를 하기 위해 며칠 동안 숙소에서 지내야만 한다는 것에 사실 우린 들떴다. 비용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정비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한인 민박을 잡았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할 수 있고, 남이 해주는 한식을 공짜로 먹을 수 있다는 것에 우린 정비소를 나오자마자 신이 났다. 게다가 똑바로 서서 따뜻한 물을 펑펑 틀어놓고 샤워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뻤다. 서서 샤워를 할 수 있다는게 이렇게 흥분되는 일일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린 퇴실하기 전 까지 틈만 나면 샤워를 하자고 다짐을 하며 민박집으로 향했다.
둘 다 민박집에서 스태프로 일을 한 경험이 있어 민박집이 마음이 편하기도 했고 물가가 비싼 프랑스에서 저렴한 숙박비에 아침 저녁을 해결할 수 있으니 경제적으로도 이득이었다. 보통의 유럽 민박집은 아침만 무료로 제공을 하는 편인데 파리의 경우 경쟁이 치열해서 아침과 저녁이 모두 무료이다. 우린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민박집은 중국 동포 아주머니가 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허름한 건물에 비해 내부는 깔끔했다. 아줌마의 숙소 안내를 받고나자마자 우린 정말 바로 샤워를 했다. 대부분의 숙박객들이 여행을 나가고 아무도 없어서 숙소의 뜨거운 물을 다 써버릴 기세로 원없이 씻었다. 여름이라 틈틈히 찬물로 차에서 샤워를 했지만 왠지 몇 달 만에 처음 씻는 기분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니 우린 우리가 해야할 일을 모두 끝낸 기분이었고 민박집 침대에 두다리를 쭈욱 뻗고 원없이 뒹굴거리고 싶었지만 민박집은 투숙객들이 모두 나가야만 일하는 사람이 청소도 빨리 끝내고 쉴 수 있다는걸 알기에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밴라이프를 시작한 이래로, 아니 혜아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우린 진짜 여행자 처럼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그동안 단 한번도 마음 편하게 여행지를 다녀본 적이 없었다. 정박지 고민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고, 주차장에 세워둔 밴을 누가 털어가지나 않을지 걱정하지 않아도 됐으며, 오늘 저녁은 무슨 요리를 해야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여행자였다. 밴라이프를 시작한지 얼마 안된 우리는 그동안 밴으로 삶을 즐기고 있다기 보단 밴라이프에 적응을 하느라 고생을 하고 있었던 듯 했다. 밴을 벗어나자 원래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 너무나 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머릿 속에는 고장난 밴이 없었다.

그동안 내가 신나는 여행을 하게 해주지 못했나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혜아는 힘든줄도 모르고 신나게 파리 시내를 걸어다녔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심지어 잘 꺼내지도 않던 DSLR까지 들고와 여행하는 모습을 찍어댔다. 물론 고르는데 1시간 가까이 걸리고 손도 부들부들 떨렸지만 점심도 사먹었으며 줄서는 식당도 안들어가는 우리가 노틀담 성당을 들어가겠다고 줄을 섰다. 이미 둘다 유럽 배낭여행을 한번씩 해봤었고 우리가 파리에서 밴라이프를 한지도 한 달이 훌쩍 넘었지만 마치 방금 처음 파리에 도착한 사람들처럼 돌아다녔다. 그냥 밴은 정비소에다 버려놓고 계속 이렇게 여행을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는 하루는 금방 지나갔다. 그날 저녁 우리 영국 민박집 스태프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투숙객들을 불러모아 맥주를 마시며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여행담들을 나누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또 샤워를 했다. 물론 전날 저녁에도 했다.
오전 시간이 다 지나갈 때 즈음 정비소에서 연락이 왔다. 역시 한국인답게 수리는 하루 만에 끝나가고 있었지만 꼭 와서 봐야할게 있다고 했다. 왜이렇게 빨리 수리를 했을까 하는 원망이 살짝 섞여 있었지만 어쨌든 큰 문제없이 차를 수리 했다고 하니 우린 그리 멀지 않은 정비소로 짐을 다시 싸들고 갔다.
건물의 지하에 있던 정비소에는 전날엔 보지 못했던 사장이 나와 있었다. 메신저로 대화를 했기 때문에 중국 동포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밴의 부품은 모두 교체되어 있었고 브레이크의 마지막 점검 중이었는데 사장은 고장난 브레이크의 상태를 보여주려고 불렀다고 했다.
브레이크는 브레이크 하우징 안에 소모품인 브레이크 패드가 브레이크 디스크를 잡아주면서 감속을 해주는 장치이다. 그런데 우리 밴의 브레이크 패드는 마모되다 못해 아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브레이크 하우징이 브레이크 디스크를 손상시키면서 작동을 하다가 하우징 내부에 있는 피스톤들까지 다 손상되면서 브레이크의 모든 부품들이 다 파손됐다는 것이다.
나 혼자 타고 다니다 사고 나면 내 잘못이니 어쩔 수 없지만 여자친구까지 태워놓고 이런 상태의 브레이크로 다니는걸 부모님이 아시면 어떠시겠냐며 화가 아닌 화를 냈다. 나도 입으로는 하하하 소리내 웃고 있었지만 창피하기도 했고 무섭기도해서 내 얼굴이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사장으로부터 몇 분간의 잔소리를 듣고 우린 옆 사무실로 들어가 앉았다. 가장 중요한 본론을 이야기할 차례였다. 사장은 우리 차를 수리하는데 들어간 부품들을 나열했다. 브레이크 디스크, 하우징, 피스톤 그리고 브레이크 패드를 양쪽 모두 갈았다고 했다. 오른쪽 바퀴는 상태가 양호했지만 구동 계통은 일반적으로 동시에 교체를 해줘야 하기 때문에 갈았다고 했다. 그리고 엉성한 부품을 쓰면 이렇게 장거리를 운행할 차들은 금방 고장이 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들어도 알만한 브랜드의 부품들로 갈았다고 부연설명을 얹었다. 그 말인즉슨 싸지 않다는 뜻이었다.
사장이 흰 종이에 손으로 우리가 보는 앞에서 쓱쓱 쓴 견적은 거의 1000 유로에 가까웠다. 펀딩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버지 한테 손을 벌려서 가까스로 여유롭게 돈을 만들어놨지만 그 돈을 죄다 수리비로 쓸 수는 없었다. 사장 옆에 앉은 난 어디서 여행을 시작했고 얼마나 돈을 쓰고 살았으며 앞으로 얼마나 더 여행을 하지 모르지만 우린 돈 없이 밴라이프를 하고 있다며 의도가 뻔히 들여다 보이는 말들을 늘어놨다. 돈 없으니 깎아달라는 소리였다. 심지어 얄팍한 영국의 한인회 인맥까지 들먹였다.
사장은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나에게 수리비로 얼마나 쓸 수 있냐고 물었다. 이 전에 시트로엥 공식 정비소에서 받은 견적서에 적혀있던 700유로가 생각나 그 금액이 우리가 낼 수 있는 최고금액이라고 답하자 1000유로 다 받아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니 다음에 꼭 또 오라며 700유로만 받겠다고 했다.
우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많은 도움들을 받고 밴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했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펀딩을 시작했으며 많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펀딩금액을 채웠고 친구의 도움으로 돈을 송금할 수 있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 덕분에 한인이 운영하는 정비소를 찾았고 덕분에 수리까지 하루만에 할인을 받아서 했다. ‘오프그리드’라는 이름으로 밴라이프를 했지만 사실 우린 단 한순간도 그리드를 벗어나서는 살 수가 없었다. 완벽하지 않은 밴 때문에 절반의 ‘오프그리드’였지만 덕분에 우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도움을 받으며 밴라이프의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원래 있었던 샹젤리제 거리 옆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이미 독립기념일은 지나 있었고 복잡한 구조물들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더위는 여전했고 할인을 받았지만 엄청난 수리비에 우리의 삶도 그리 나아진게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파리를 떠나기로 했다. 돈이 많지는 않아도 우리가 먹고 마실 만큼 충분했으며 밴에 기름을 넣고 달리기에 문제 없었다.
많지 않지만 없지 않으니 우린 행복했다. 안정된 집은 없지만 떠날 곳이 있으니 즐거웠다. 절대 힘들지 않거나 슬프지 않고 후회되지 않은 적이 없지만 우리는 힘들지 않고 슬프지 않으며 후회하지 않아도 되는 아름다운 곳을 언제든지 갈 수 있고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으니 괜찮았다.

한여름의 더위가 한창인 오후, 우린 그동안 너무 시끄러운 도시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정신없이 지냈으니 우리 둘만 조용히 지낼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역시나 방전된 배터리를 옆 차의 도움으로 점프시켜 시동을 걸고 우린 어디인지 모르지만 시원한 물가를 찾아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