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자연 속 밴라이프란
파리를 떠나기 전 우린 작은 한인마트에 들러 필요한 물품들을 채웠다. 파리에 들어올 때 보다는 경제적인 여유가 조금은 더 있었으니 고추장과 된장 외에도 그동안 너무나 먹고 싶었던 것들을 조금 욕심을 내서 사기로 했다. 욕심을 내봤자 신라면과 불닭 볶음면 그리고 냉면 정도였지만 언제 다시 도시로 들어갈지 알 수 없으니 우리에겐 너무나 소중한 보물이나 다름 없었다. 우린 거의 항상 한식을 해먹었지만 영국을 떠난 이후론 한인 슈퍼를 간 적은 거의 없다. 왠만한 재료는 현지 슈퍼에서도 다 구할 수 있었고 라면은 며칠만 안먹으면 참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를 벗어난 후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국도만 따라서 다녔다. 프랑스의 고속도로는 유료이기도 했고 우리 밴은 속도가 빠르지도 않았으며 여전히 기름값을 아끼기 위해 저속으로만 달렸다. 항상 시속 70킬로미터 이상으로 절대 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고속도로에 들어서면 지나가는 차들마다 경적을 울려대기 일쑤였다. 그래서 좀 멀리 돌아가더라도 국도로만 이동했다.
사실 고속도로로 가는 것은 우리와 잘 맞지 않았다. A라는 지점에서 출발해 B까지 빠른 시간 내에 도착해야하는 여행이라면 고속도로는 최고의 선택이겠지만 우리에게는 B라는 도착지점이 없었기에 서둘러야할 이유가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아스팔트만 길게 뻗은 고속도로는 너무나 심심하고 지루한 곳이었다. 어느 나라의 국도나 다 그렇겠지만 유럽의 국도들은 현지인들의 마을과 마을 사이를 구석구석 지나가고 있어서 항상 볼거리가 많았고 언제든지 차를 세우고 산책을 하거나 마음에 드는 곳에서는 하루 잘 수도 있었다. 그런 국도는 우리처럼 계획없고 느긋한 밴라이퍼들에게 최고의 길이었다.
에어컨 없는 밴라이프
8월의 프랑스는 너무나 더웠다. 아니 유럽의 2018년도 8월은 기록적으로 더웠다. 매일 뉴스에서는 더위로 프랑스에서 몇 명이 죽고 독일에서 몇 명이 죽었다는 얘기가 나왔고 SNS를 통해서 듣는 다른 밴라이퍼들도 더위를 참지 못하고 북유럽으로 올라 갔다거나 물가 근처에 정박을 해놓고 하루종일 물놀이만 한다는 소식들로 가득했다. 밴에는 실내에 에어컨을 장착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밴 자체에도 차량용 에어컨이 없었다. 때문에 낮에 이동하는 것은 매일이 도전이었다. 아무리 창문을 활짝 열고 달려도 차 안으로는 뜨거운 바람이 밀려들어왔고 썬팅이 되어 있지 않은 밴의 유리창으로는 직사광선이 쏟아져 내렸다. 이동을 할 때면 혜아와 나는 사귄지 6개월도 채 안되었을 때였음에도 마치 40년은 같이 산 부부 마냥 아무 말이 없었다. 뜨거운 열기에 숨을 쉬는 것 조차도 힘든데 더위에 지쳐서 말을 할 기운이 있을리가 없었다. 옷은 벗지만 않았을 뿐이지 거의 다 말아올리거나 가릴 수 있는 곳만 겨우 가리는 차림이었다.
때문에 장시간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2시간 정도 이동을 하다가 우린 캠핑앱을 이용해 물가에 주차할 수 있고 나무와 풀로 둘러싸여 아주 아늑하다는 리뷰가 적힌 장소에 차를 세웠다. 나무와 풀로 둘러싸여 있긴 했지만 호수는 멀리 있었고 들어가는 길도 너무 우거져 있었으며 물놀이를 하기 힘든 습지에 가까웠다. 캠핑 앱의 리뷰가 항상 정확하지는 않았기에 실제로 왔을 때 우리 마음에 드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도저히 더 이상 이동을 할 수 없을거 같아서 우린 일단 머물기로 했다. 모기가 조금 날아다니긴 했지만 개의치 않고 문과 창문을 모두 열어 젖힌 채 밖에 테이블을 펼쳤다.

자연 속에서 맨몸으로 샤워하다
호수에서 수영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우린 찬물로라도 샤워를 해서 몸을 식혀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여름 밴라이프의 좋은 점은 찬물로 샤워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린 밴의 뒷문을 활짝 열고 샤워 호스만 빼서 밖에서 벌거벗은 채 샤워를 했다. 정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자유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샤워를 하고 있자니 모든걸 다 가진 듯했다. 하지만 시원함은 그리 오래 가지못했고 30도가 훌쩍 넘는 온도에서는 밴 안에 조금만 앉아 있으니 숨이 턱턱 막히고 금새 땀으로 온몸이 끈적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호수에서 수영을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분명히 어딘가에 적당한 장소가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한참 전부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근처에 무언가가 있다는걸 짐작할 수 있었다. 더위에 늘어져 있는 혜아를 잠시 밴에 두고 난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땡볕을 걸어다니는건 싫었지만 아무것도 안하고 땡볕 아래 앉아있는건 더 싫었다. 밴을 세워 둔 숲을 벗어나 우리가 들어왔던 길을 따라 다시 걸어나가니 아까는 보지 못했던 숙박시설이 보였다. 분명히 근처에 무언가 있는게 틀림없었다. 아름드리 나무들을 따라 우거진 풀들을 헤쳐 10분 가까이 걸어나가니 저멀리 주차장이 있었다. 우거진 풀들을 헤쳐나오느라 여기저기 긁혀 피가 나는 다리를 끌고 주차장으로 가니 거짓말 처럼 해변가가 펼쳐졌다. 바다가 아니라 호수였지만 엄청난 크기 때문에 모래사장으로 된 호숫가에 사람들이 모여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였다.
밴라이프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우린 시원한 해변가에 누워서 햇볕을 즐겼다. 같은 햇볕인데 밴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아늑한 느낌이였다. 조금 덥다 싶으면 물 속으로 들어갔다. 물이 깨끗해보이진 않았지만 그런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밴이 바로 옆에 있지 않다는 점이 아쉬웠다.
혜아가 수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고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심심하고 배가 고파진 우리는 밴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멀리 떨어진 차로 터덜터덜 걸어가던 중 아까 지나쳐 온 아름드리 나무들이 늘어선 곳에 누군가 불을 피웠던 흔적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그곳이 캠핑을 하기엔 훨씬 나아보였다. 나무그늘은 충분했고 바로 옆은 차도가 지나가고 있었지만 구석진 국도라 차량도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조용한 밤을 보낼 수 있을거 같았다. 우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밴을 그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해는 조금씩 기울고 있었지만 더위는 여전했기에 문을 활짝 열어놓고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밥을 짓고 삼겹살을 구었으며 파절이도 만들고 상추도 빠짐없이 씻었다. 게다가 우린 파리의 한인마트에서 사온 물냉면까지 있었다. 너무나 완벽한 한식메뉴였다. 프랑스 시골 아름드리 나무 아래에서 수영을 하고 삼겹살과 냉면을 먹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오늘 만큼은 밴 안에 갇혀서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선선한 해질녘 수영 후에 먹는 저녁은 반드시 야외여야만 했다. 그래서 우린 슬라이딩 도어를 활짝 열어놓고 바로 앞에 IKEA 테이블을 펼쳐 놓은 채 노트북으로 한국 티비를 틀어놓고 정신없이 삼겹살을 흡입했다. 말그대로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집어 삼켰다. 정말 한국의 맛이었다. 삼겹살이 조금 남았을 때 물냉면을 만들어서 삼겹살과 같이 먹으니 아예 한국에 와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럴 때 맥주가 빠져서야 되겠는가. 난 밥을 먹다말고 아껴 마시고 있던 맥주를 가지러가기 위해 일어났을 때 즈음 이미 해는 많이 기울어져서 밴 안이 어둑해져 있었다. 맥주를 찾기 위해 실내등을 켜자마자 눈앞이 뿌옇게 보였다. ‘고기를 굽느라 차 안에 연기가 가득 찼나’라는 생각이 잠깐 들자마자 연기가 여기저기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일어선 혜아가 맞은 편에서 뿌옇게 보였다.
밴 안은 감히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모기들로 가득차 있었다.